성장 강요의 시대

배경

과거의 성장은 대체로 선택의 영역에 가까웠다. 더 높은 연봉이나 승진, 전문성, 자기실현처럼 개인이 원할 때 추구하는 목표였고, 일정 수준의 역량을 갖춘 뒤에는 그것을 유지하며 사는 삶도 가능했다. ‘지금 상태를 지키는 것’ 자체가 부정적으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근의 성장 담론은 성격이 달라졌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정체가 아니라 도태의 위험으로 인식된다. 기업은 구성원에게 더 큰 영향력과 빠른 적응력을 요구하고, 채용 과정에서는 현재 역량뿐 아니라 성장 가능성과 속도까지 평가한다. 개인은 기술 변화와 경쟁 심화, 불안정한 노동시장 속에서 끊임없는 학습과 자기계발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압박은 직장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SNS는 특정 나이 이전의 성취를 부추기고, 독서와 운동, 자격증, 사이드 프로젝트 같은 자기계발은 일상이 되었으며, 자산조차 ‘계속 키워야 하는 것’으로 다뤄진다. 즐거움을 위한 취미마저 기록과 성과의 대상이 되면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자기 최적화의 무대가 된다.

그 결과 성장은 점차 욕구나 선택이 아니라 의무에 가까워진다. 배움은 호기심보다 생존 전략이 되고, 도전은 가능성의 탐색보다 불안의 회피가 되며, 성취는 만족보다 잠깐의 안도에 머문다. 성장 그 자체보다 ‘멈추면 뒤처진다’는 감각이 행동을 떠미는 주된 동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던져야 할 질문은 “얼마나 빨리 성장하는가”가 아니다. 그보다 어떤 성장이 나의 선택이고, 어떤 성장이 불안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가를 구분하는 일이다. ‘성장 강요의 시대’라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성장은 어떻게 의무가 되었는가

성장이 선택에서 의무로 바뀐 데에는 한 가지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의 구조적 압력이 기업을 거쳐 개인에게 전가되고, 문화적 장치를 통해 증폭되며, 다시 개인의 내면에 불안으로 자리잡는 일련의 과정에 가깝다. 따라서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개인의 의지나 태도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조건들이 어떻게 맞물려 작동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개인이 받는 성장 압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앞에는 대개 기업이 있다. 그러나 기업 역시 스스로 성장을 원해서 요구하는 주체가 아니다. 기업은 투자자와 주주로부터, 더 넓게는 자본시장 전체로부터 끊임없는 성장을 강요받는다. 매출과 이익은 늘 지난 분기를 넘어서야 하고, 외부 자본을 받은 기업일수록 고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가 된다. 기업에도 정체는 자본의 이탈을 뜻하므로, 멈춤은 곧 도태다.

그러나 그 자본 역시 사슬의 출발점에 자유롭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도 더 높은 수익을 좇는 경쟁과 끝없는 성장을 전제하는 시스템 안에서 움직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 사슬에는 의지를 가지고 강요하는 가해자가 따로 없다. 강요하는 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끝없는 성장을 당연하게 여기는 구조 그 자체다.

문제는 기업이 받은 이 압력이 구성원에게 거의 그대로 흘러내린다는 데 있다. 자본이 요구하는 성장은 더 적은 비용으로 더 큰 성과를 내라는 효율의 압박으로 번역되고, 효율의 압박은 다시 한 사람이 이전보다 더 넓은 범위와 더 큰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흔히 개인의 성장 과제로 제시되는 ‘더 큰 영향력’과 ‘빠른 적응력’은, 실은 기업이 시장에서 받은 압력이 인력의 성장이라는 형태로 옮겨진 것이다. 채용과 평가가 현재 역량보다 ‘성장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것 또한, 불확실한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만들어 줄 사람에게 미리 베팅하려는 같은 동기에서 비롯된다. 결국 개인이 마주하는 성장 강요의 상당 부분은 기업의 고유한 의지가 아니라, 기업을 통과한 자본의 압력인 셈이다.

이 전가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고용의 방식이다.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고용이 유연해지면서, 안정의 단위는 ‘직장’에서 ‘개인의 고용 가능성’으로 이동했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며, 자신의 시장 가치를 스스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이 개인에게 넘어왔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점차 가치가 변동하는 일종의 자산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자산은 방치하면 가치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하락하므로, 끊임없이 가치를 키우는 일이 합리적인 행동이 된다. 성장은 이 논리 위에서 권장이 아니라 관리의 의무가 된다.

여기에 기술 변화의 속도가 더해진다. 디지털 환경, 특히 최근의 AI 확산은 한 번 익힌 역량의 유효기간을 빠르게 단축시켰다. 어떤 분야에서는 몇 년 전의 전문성이 이제는 기본기에 가까워지고, 익숙한 도구가 순식간에 대체된다. 이런 환경에서 멈춰 있는 것은 현상 유지가 아니라 실질적인 후퇴를 의미한다. 가만히 있어도 뒤처지는 구조에서 학습은 더 나아지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제자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 조건이 된다.

이러한 외부의 압력은 그 자체로도 강력하지만, 그것을 당연한 감각으로 만드는 것은 문화적 장치다. 그 중심에는 성취를 노력의 정당한 결과로 보는 능력주의가 있다. 능력주의 안에서 성장은 단순한 이득을 넘어 도덕의 문제가 된다. 더 나아지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으로, 멈춰 있는 사람은 노력을 게을리한 사람으로 해석되기 쉽다. 그 결과 성장은 ‘하면 좋은 것’에서 ‘하지 않으면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옮겨가고, 외부의 요구는 어느새 자기 자신을 향한 도덕적 명령으로 바뀐다.

비교의 환경은 이 감각을 한층 더 증폭시킨다. SNS와 콘텐츠 플랫폼은 타인의 성취를 끊임없이 노출시키며, 또래의 연봉과 이직, 사이드 프로젝트, 자산 증식이 일상적으로 가시화된다. 여기서 불안을 만드는 것은 절대적인 정체가 아니라 상대적인 박탈이다. 동시에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는 측정과 최적화의 문화가 이 비교를 더욱 촘촘하게 만든다. 운동 기록, 독서량, 학습 시간, 수익률처럼 정량화할 수 있는 지표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영역이 성장의 대상으로 편입되고, 즐거움을 위한 활동조차 개선해야 할 성과가 된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강요가 전해지는 방식 자체가 한층 교묘해졌다. 과거의 조직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했다면,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조직은 구성원에게 ‘주도적으로 성장하라’고 요구한다. 방향을 스스로 정할 자유를 주되 성장해야 한다는 의무만큼은 거두지 않는 이 방식은, 외부의 강요를 자율의 얼굴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자유가 늘어난 만큼 압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 시킨 일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일이 되는 순간, 압력은 맞설 대상을 잃고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타인이 가하던 강요는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자기 강요로 옮겨간다.

이렇게 외부의 구조와 문화적 장치가 맞물리고 강요마저 자율의 외양을 입으면, 그 압력은 결국 개인의 내면에 불안의 형태로 자리잡는다. 성장은 더 이상 바깥에서 주어지는 요구가 아니라, 멈추는 순간 뒤처질지 모른다는 내면의 감각으로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 성장의 동력은 욕구에서 조용히 불안으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토록 붙들고 있는 성장이란 대체 무엇인가. 원인을 따라온 물음은 이제 성장이라는 개념 그 자체로 향한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성장’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면서도 가장 모호한 단어 중 하나다.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회사는 구성원의 성장을 기대하며, 채용 과정에서는 성장 가능성을 평가하고, 개인은 스스로 성장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한다. 그러나 정작 성장의 의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합의된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성장은 흔히 연봉 상승, 승진, 더 높은 직급, 더 많은 성취와 연결된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성장 그 자체라기보다 성장의 부산물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성장은 전문성의 축적이고, 누군가에게는 더 넓은 영향력을 갖는 일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전에는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변화다. 그리고 이 마지막 의미가 성장의 가장 단순한 정의에 가깝다. 성장은 이전의 나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변화다.

여기서 문제란 단순히 기술적 과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협업,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 실패 이후의 회복, 더 큰 책임, 더 넓어진 영향 범위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성장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더 복잡하고 더 불확실한 상황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든 성장은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주어진 과제를 해내는 수준에서 시작해, 일이 놓인 맥락과 비용을 함께 고려하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막아 내며, 자기 몫을 넘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성과까지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사고가 확장될 때 비로소 그것을 성장이라 부른다. 개인이 다룰 수 있는 문제의 깊이와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가 말하는 성장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조직이 기대하는 성장은 현재 능력보다 미래 가치의 증가 가능성에 가깝다. 채용 과정에서 언급되는 ‘성장 가능성’은 지금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보다, 앞으로 더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를 의미한다. 새로운 환경을 배우는 속도, 피드백을 흡수하는 방식, 실패 이후 수정하는 능력, 익숙하지 않은 영역으로 확장하는 태도가 평가 대상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장 가능성을 본다는 것은 현재의 역량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동시에 본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성장은 왜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가. 우리가 성장하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멈춰 있는 사람에게 쉽게 불안을 느끼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성장이 더 이상 선택이나 자기실현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이 경쟁력과 생존의 조건이 된 만큼, 그것을 원하는 마음과 뒤처짐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점점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성장의 속도나 크기가 아니다. 나는 무엇을 해결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성장하려는가, 그리고 지금의 성장은 나의 욕구인가, 아니면 불안이 요구하는 생존 전략인가. 성장에 대한 논의는 결국 이 질문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성장 강요는 선인가 악인가

그렇다면 불안에서 비롯된 성장은 나쁜 것이라고 단정해도 좋은가. 성장 강요를 다루는 논의는 흔히 그것을 시대의 병폐로 규정하는 데서 멈추지만, 강요가 곧 해악이라는 결론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같은 압력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넘어서게 하는 계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갉아먹는 굴레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현상은 선과 악의 어느 한쪽으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먼저 강요에는 분명한 선의 얼굴이 있다. 사람은 대체로 익숙함과 편안함에 머무르려는 관성을 지니며, 외부의 압력이 없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성장이 적지 않다. 마감이 실력을 끌어올리고, 높은 기대가 잠재력을 드러내며, 불편한 요구가 한 단계 위의 문제를 다루게 만드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더욱이 동기가 불안이었다 해도, 그 과정에서 쌓인 역량과 경험까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작이 두려움이었더라도 결과로 남은 능력은 분명한 자기 것이다. 이 점에서 성장 강요는 개인과 사회를 실제로 앞으로 밀어온 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같은 강요에는 그만큼 뚜렷한 악의 얼굴도 있다. 동기가 불안에 묶여 있을 때, 성장의 경험은 성취감보다 소진과 자기소외로 귀결되기 쉽다. 더 큰 문제는 이 압력에 도달점이 없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 자본이 요구하는 성장은 무한하므로, 그것이 전가된 개인의 성장에도 끝이 없다. 도달해도 안도가 아니라 다음 기준이 기다리는 구조에서, 성장은 만족이 아니라 항구적인 결핍을 낳는다. 나아가 강요가 일상이 되면 무엇이 내 욕구이고 무엇이 떠밀린 불안인지 구분하는 감각 자체가 무뎌지고, 삶의 기준을 스스로 정할 자리를 시장에 내어주게 된다. 멈출 자유와 유지·회복의 정당성은 그렇게 조용히 사라진다.

결국 성장 강요는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같은 압력이라도 그것이 나의 역량과 삶을 실제로 확장한다면 선에 가깝고, 나를 소진시키고 판단력마저 빼앗는다면 악에 가깝다. 선과 악을 가르는 것은 강요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형식이 아니라, 그 압력과 내가 맺는 관계다. 그러므로 물음은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성장 강요가 선인가 악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이 피할 수 없는 압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로.

압력과 어떻게 살 것인가

압력을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자본에서 기업으로, 다시 개인에게로 흘러내리는 구조적인 힘이며, 한 사람의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압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압력과 맺는 관계를 다시 쓰는 것이다. 성장의 속도나 크기를 시장이 정하게 두는 대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의 주도권을 조금씩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일이다.

그 첫걸음은 구분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배우고 도전하려 할 때마다,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해서인지 아니면 뒤처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밀린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미 짚었듯 욕구와 불안은 깔끔하게 나뉘지 않으며, 많은 경우 둘은 뒤섞여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명확한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묻는 행위 그 자체다. 불안은 의식하기도 전에 우리를 다음 행동으로 떠미는 자동 반응이고, 질문은 바로 그 반응과 행동 사이에 짧은 틈을 낸다. 그 틈에서 우리는 떠밀리던 상태로부터 한 발 벗어나, 자신의 선택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다음은 리듬을 되찾는 것이다. 무엇이든 쉼 없이 가속하기만 할 수는 없으며, 성장에도 깊이 나아갈 때와 멈추어 회복할 때가 있다. 멈춤을 도태로 여기는 감각은 자본의 무한한 리듬을 그대로 내면화한 결과다. 그 리듬을 자신의 것과 분리하고, 유지와 회복을 뒤처짐이 아니라 정당한 국면으로 받아들일 때, 성장은 끝없는 가속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과정이 된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기준을 되찾는 일이 남는다. 어떤 조직은 무엇을 익히고 어떤 역할을 맡을지까지 정해 주고, 또 어떤 조직은 ‘주도적으로 성장하라’며 방향을 정하는 일조차 개인에게 맡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것을 왜 하는지, 어디까지가 나에게 의미 있는지, 어떤 속도로 받아들일지에 대한 해석만큼은 끝까지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같은 요구라도 ‘시켜서 하는 일’로 받으면 강요가 되지만, ‘내가 다룰 수 있는 문제의 범위가 넓어지는 일’로 번역하면 그것은 나의 성장이 된다. 요구 자체는 그대로여도, 그것에 내 의미를 입히는 순간 압력과 나의 관계는 바뀐다.

다만 방향까지 개인에게 맡겨질수록, 이 번역은 오히려 더 까다로워진다. 강요가 자율의 얼굴을 하고 다가올 때, 욕구와 불안의 경계는 가장 희미해진다. 회사가 원하는 길을 내가 자발적으로 택한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탓이다. 방향을 위임받는 자유는 분명 더 나은 환경이지만, 그만큼 압력은 ‘내 선택’의 외양 뒤로 숨어 구분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주도성을 존중받을수록, ‘이것이 정말 나의 방향인가’를 되묻는 일은 더욱 절실해진다. 기준을 되찾는다는 것은 회사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요구에 휩쓸려 나를 잃지 않는 것에 가깝다.

물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 기준과 회사의 요구가 자주, 그리고 근본적으로 어긋난다면, 그것은 더 견뎌야 할 문제가 아니라 자리가 맞지 않는다는 신호다. 그리고 그 신호를 따라 떠날 수 있으려면 시장에서의 가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성장은 자율성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키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끊임없이 가치를 키우라는 압력이, 역설적으로 그 압력에서 벗어날 힘이 되는 것이다. 다만 그 떠남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열려 있지는 않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은 끝내 하나의 답에 도달하지 못한다. 구분도, 리듬도, 기준도 압력을 없애 주지는 못하며, 무엇이 나의 욕구이고 무엇이 떠밀린 불안인지는 내일 다시 흐릿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성장 강요의 시대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 긴장을 단번에 푸는 것이 아니라, 답이 고정되지 않는 이 질문을 살아 있는 채로 곁에 두는 것이다. 멈추지 않고 계속 묻는 한, 적어도 우리는 불안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성장을 붙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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